백우(白牛) 이신백(수필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울도봉구 자문위원)
김치는 한국인의 정체성과 혼이 깃든 국민의 식단 지킴이이자 건강 파수꾼이다. 국이나 고기가 없어도 밥을 먹을 수 있지만, 김치 없이는 한 끼 밥도 먹기 힘들어하는 것이 옛 선조들과 어른들의 식습관이다. 이렇듯 김치는 예로부터 주식인 쌀과 함께 한국인의 식단을 지켜왔고 현대인들에게도 식사 때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반찬으로 군림한다.
배추김치 가운데 ‘백(白)김치’의 경우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만찬장에 내놓아 각국 정상들로부터 그 맛을 평가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한국인의 식단문화 역사와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김치이기에 ‘김치 담그기’ 즉 김장 문화가 2013년 유네스코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그 후 국가 무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김치는 재료와 담그는 방법에 따라 그 종류가 무수히 많다. 또한, 같은 종류의 김치라도 지방과 가정에 따라 재료와 담그는 방법이 천차만별일 뿐 아니라 맛도 다양하다. 김장의 주재료이자 삼시 세끼 우리네 식단을 지키는 배추김치의 경우 통배추 김치, 보쌈김치, 백김치 등이 있다.
그림은 AI(뤼튼)를 활용해 작성했습니다. 그림= 윤은자
내가 김치를 담근 생애 첫 경험은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봄. 거의 환갑 나이에 이르러 ‘싱글’이 되고 나서다. 삼시 세끼 식단에 배추김치가 없으면 식사하기가 힘든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기에 홀몸 처지에 지방에 사는 형수님들께 김치 좀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면 식품회사가 만든 김치를 사 먹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고민했다. 하지만 남에게 부탁하는 것도, ‘감칠맛, 깊은 맛’을 느끼지 못하는 김치를 사 먹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이도 저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입맛’에 맞는 김치를 손수 담그는 수밖에 대안이 없지 않은가.
2002년 초 직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허울 좋은 (강제) 명퇴를 당한 후 그해 봄 직업전문학교 6개월 과정의 한식 조리사 과정을 이수했다. 절박감과 무지(無知)는 용감하다.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 배추김치 담기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기로 했다. 6월 마침내 농협에서 절임 배추 10kg을 사서 나름대로 창의력을 발휘해 고춧가루, 마늘, 생강, 새우젓, 멸치액젓 등 양념용 재료를 사다가 종류와 수량 등 레시피를 적으면서 차근차근 김치 담기 절차를 진행했다. 김치 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양념배합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순간은 마치 시험을 보듯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이다. 생애 처음 배추김치를 담글 양념배합을 하여 맛을 봤지만, 양념에 버무린 김치 맛이 어떨지 ‘감’ 잡기는 쉽지 않았다. 양념에 정성껏 버무린 김치를 김치통에 담으면서 맛을 보니 입맛에 꼭 맞을뿐더러 양념의 양도 남김이 없이 정확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Eureka·알아내다 뜻의 그리스어)’를 외치듯 나도 모르게 기쁨에 넘쳐 “그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야“ 하며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외쳤다. 감격 그 자체였다. 그해 6월 16일은 나의 첫 김치 담기 기념일이다.
그날 이후 처음 작성한 레시피를 바탕으로 기본양념 외 매실액과 사과, 배, 오징어, 굴 등 맛을 내는 재료들을 추가해가며 특히 노령의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부추와 파김치를 비롯해 총각무, 동치미, 갓김치, 열무물김치, 오이소박이, 깻잎 김치 등을 담아 먹으면서 오늘에 이른다. 배추겉절이나 생김치보다 어느 정도 숙성된 김치를 좋아하는 식성인지라 때론 삭은 김칫국물을 계량컵으로 한 두 컵 정도를 김치 양념배합 때 섞거나 갓 담근 배추김치 통을 발코니에 한나절 정도 내놓아 숙성을 촉진해 냉장고에 보관한다. 이럴 경우 며칠 지나면 내 입맛에 맞는, 감칠 맛 나는 김치가 완성된다. 숙성된 배추김치는 요구르트보다 유산균이 8배나 많이 함유된 유산균의 보고(寶庫)라고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다.
이렇게 만든 김치 ‘작품’을 함께 문학회 활동을 하는 여성 문우(文友)들과 식사하는 기회에 내놓으면서 맛을 보고 품평을 해 달랬더니 아주 맛있다는 반응이었다. 누가 담았냐고 묻기에 내가 담갔다고 했더니 믿으려 하지 않는다. 김치든 요리든 맛은 재료와 손맛과 정성 등 세 가지 요소가 좌우한다고 본다. 무슨 일을 하거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엔 신(神)이든 악마든 ‘디테일’에 있다. 손맛과 정성은 김치 담그기의 디테일이다.
어쨌거나 18년 차 전업주부인 처지에 이제는 끼니마다 두세 가지의 김치에다 나물류와 국 등 항상 다양한 반찬으로 풍성한 식단을 꾸며, 음악을 들으며 싱글 노인이 ‘혼밥’을 즐긴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따로 없다.
한국인의 혼이 깃든 건강식품이자 독특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에스닉(Ethnic) 식품인 김치! 김치 가운데 대표 격인 배추김치에 다양한 기능성과 문화적 요소를 가미해 한국인이 김치에서 느끼는 맛과 정서를 외국인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K-팝, K-영화 등 함께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식품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김치! 파이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