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미숙
가을비가 사부작사부작 내리는 출근길에 아들 또래의 김 선생의 얼굴이 떠올라 김밥 두 줄을 더 챙겼다. 가냘프고 맘이 여린 그녀가 이번에 상심이 클까 봐 걱정이다.
“선생님, 이번에도 또 수강생이 줄었어요. 폐강되면 어떡해요.”
역사논술을 가르치는 그녀는 막 서른 줄에 들어섰다. 이번 분기에 접수한 서너 명의 학생을 두고 수업을 계속할지 고민 중이다. 나를 보면 안개꽃처럼 수줍게 웃어주는 그녀가 언제쯤 꽃다운 젊은이답게 환하게 미소 지을지 안쓰럽다.
“엄마한테 늘 죄송해요. 맏이 노릇도 못 하고……”
줄줄이 동생을 거느린 그의 하소연이다. 용돈 벌이도 안 되는 강사료로 버티기 힘들다며 풀죽은 그녀에게 마땅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다. 그녀와 김밥 한 줄을 나눠 먹었다.
날카롭게 잠을 깨우는 알람을 서둘러 껐다. 아침부터 손이 바쁘다.
“엄마, 웬 김밥?”
샤워를 마친 아들이 김밥 꼬랑지를 집어 든다.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려봤다.”
좋아하는 참치 치즈 김밥을 뚝딱 먹어 치운 아들이 내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아르바이트로 늦게 잠들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딸아이가 “엄마 김밥 쌌어요? 맛있겠다. 친구랑 학교 가서 먹게 두 줄만 싸줘요.”
대학 졸업반인 딸아인 몸과 마음이 바쁘다. 김밥을 좋아하는 식구들을 위해 넉넉히 몇 줄 더 말아놓았다.
매일 아침 김밥을 말던 날이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이의 낯빛이 어두운 날엔 김발을 누르는 손에 힘이 빠졌다. 옆구리 터져버린 김밥처럼, 쓰린 내 가슴도 타들어 갔다. 그럴 때마다 먹빛 같은 김을 펼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김밥을 말고 또 말았다. 인생을 건너는 뗏목 위에 선 아들, 김발같이 얇은 그 위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으며 얼마나 힘들고 불안했을까. 단단한 밥알 속에서 피어오르는 삼색의 꽃들처럼 그도 이제 서서히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어릴 적 김밥은 특별한 날에나 맛보는 기다려지는 음식이었다. 어느 소풍 가는 날 아침, 들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김밥을 싸주셨다. 점심시간 친구들과 둘러앉아 두근거리며 도시락을 열었다. 들기름으로 버무려 싼 내 김밥은 빛깔이 누르스름해서 하얀 쌀밥으로 싼 아이들 것과 달랐다. 어린 마음에 누런 보리밥으로 싼 것처럼 보일까 부끄러웠다. 할머니를 원망하며 서둘러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모양이나 빛깔은 예쁘지 않았지만, 정성이 듬뿍 들어갔을 할머니 표 김밥의 맛은 아직도 입안을 감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일상적인 삶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평범하지만은 않다. 청춘은 아름답다 하는데, 빛나는 그 시절을 온통 취업 걱정에 짓눌린 무거운 어깨를 보면 가만히 다독여주고 싶다.
어젯밤 뉴스에 노량진 학원 수험생들이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김밥 한 줄 사 먹으며 공부를 하는 모습이 비춰졌다. 그들 속에 있었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로를 또다시 고민하는 김 선생의 모습도 지나갔다. 저들에게 따뜻한 김밥 한 줄 입에 넣어주고 싶다. 김밥은 내가 먹기 위해서 만들기보다는 식구들을 먹이기 위한 음식이다. 그래서 김밥을 싸는 마음이 더 애틋하다.
한 줄 김밥이 나에게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가슴 먹먹한 위로이고 아득한 추억인 것이다.
유난히 화창한 오후, 특별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고기 김치 김밥을 싸서 둘레길에 나섰다.
모처럼 동행하는 딸아이가 아빠와 오빠에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졸업반인 딸아이도 이제 사회로 나가야 할 기로에 서 있다.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김발 같은 뗏목 위에 인생이라는 항해를 시작했으니 도착지점이 나올 것이다.
옆구리를 터트려가며 말은 김밥, 한 장의 김에 삼색의 재료가 꽃을 피우듯 앞으로 펼쳐질 아이들의 미래도 활짝 꽃 피우길 소망한다. 끈적거리는 밥알처럼 붙어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늘 힘이 되고 아이들의 열정과 노력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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