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럽던 눈 내리던 그 날, 나는 구석에 처박혀져 잊고 있던 오래된 명리 서적 한 권을 펼쳤다. 바랜 종이 위에서 음과 양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글자들이 일렁였다.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빛들이 쌓여갔다. 시간도 그렇게 쌓이는 걸까.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하얀 흐름 속에 잠겨 있는 것일까!
사주팔자, 여덟 글자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그것은 마치 물속에 잠긴 나뭇가지처럼 흐릿하고도 선명했다. 때로는 달빛처럼 차갑게, 때로는 아침 햇살처럼 따사롭게 우리의 삶을 비추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글자들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년월일시’가 비쳐진 삶의 그림자. 이 그림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의 기록이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우리도 그 순간부터 시간의 흔적을 온몸에 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흐르는, 강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어떤 이는 급류를 타고, 어떤 이는 고요한 물살을 따라 흘러간다는 것을.
내 눈 앞에 펼쳐진 사주 명리서는 나에게 들려준다.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모든 것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고. 마치 계절이 돌고 돌 듯이, 마치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우리의 삶도 그런 순환 속에 펼쳐져 있다고.
창밖에는 하얀 눈이 계속 내렸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왜 이토록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지를. 어쩌면 그것은 현재의 고통을 견디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불안이라는 검은 물감이 하얀 도화지를 물들이듯,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미래라는 검은 불안으로 물들어간다.
사주명리학은 말하고 있다. 당신은 봄에 핀 진달래 같다고. 혹은 겨울의 매화 같다고. 때로는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라고. 그것은 마치 시간과 공간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해주는지도 같았다. 여기, 바로 여기가 당신의 자리라고 속삭이는.
나는 책장을 넘겼다. 오랜만에 보는 글자들이 문뜩 낯설게 춤추었다. 그것은 마치 강물 위에 비친 달빛의 일렁임 같았다. 명리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도 이 창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흐르고 있는 한 줄기 강물이라고. 때로는 범람하고, 때로는 말라붙더라도, 그것이 모두 당신이라고.
하얀 눈은 여전히 내렸다. 창가에 쌓인 눈이 마치 살아온 시간처럼 켜켜이 쌓여간다.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우리가 왜 사주명리학을 들여다보는지를,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 비친 자기 삶의 민낯을.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쁜 그 얼굴을. 그것이 모두 우리의 얼굴이라고 사주명리학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아주 나지막이. 마치 눈이 내리는 소리처럼 고요하게 ‘당신의 시간도 아름답다’라고 당신이 흘러가고 있는 그 삶의 방향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책을 덮었다. 창밖의 하얀 것들이 계속해서 무심히 쌓여만 갔다. 시간도 그렇게 쌓이겠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품은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우리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쌓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강줄기를 따라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지.
이제 하얀 눈이 그쳐가고 있다. |
